▲ 백화주를 빚기 위해 말린 꽃 백 가지를 준비하고 있는 '학성강당' 김종화씨. |
ⓒ 전라도닷컴 |
지금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 술이지만, 당초 술은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관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술 이전에 약’이었다.
몸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약효를 전달한다는 그 기능으로 말미암아 술은 또한 ‘백약의 으뜸’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았다. 약초, 약물, 약탕 등과 같은 맥락에서 ‘약주’라는 말이 나왔다는 설명이다.
집안 됨됨이가 가늠된다는 점에서 옛 사대부들에게 손님 대접은 아주 중요한 처신에 속했다. 먼길을 걸어 부러 찾아온 손님에게 몸을 보補해 줄 가장 좋은 먹을거리를 내놓는 것은 당연한 이치. 그래서 손님대접의 으뜸이 술이었고, 이름 있는 집안일수록 ‘가양주’의 전통이 단단하게 자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디에 내 놔도 꿇리지 않는, 당당한 술을 빚어 내려는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백화주百花酒의 전통을 이어 오고 있는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학성강당’ 김종회(40)씨의 말이다.
백화주 그 자체만으로는 ‘당당한 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동의보감』 『임원십육지』 『규합총서』 등의 문헌에 백화주 만드는 방법이 상세히 나와 있는데 만드는 이들에 따라 조금씩 다를 뿐, ‘백가지 꽃’이 들어간다는 점을 빼면 그 제조 방법은 서로간에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학성강당 백화주의 정확한 이름은 ‘백초화춘(百草花春)’이다. 백 가지 약초와 백 가지 꽃이 어우러져 나온 술. 단지 여러 종류의 약초와 꽃이 들어갔을 뿐이고, 완성을 의미하는 일백 백百 자를 붙인 것은 아닐까.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정확히 백 가지 약초와 꽃이 들어갑니다. 먼저 약초만으로 백초주를 만들고 거기에 꽃을 넣어 백초화춘을 만듭니다. 마지막 춘春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품격있는 술에 술 주酒자 대신 붙이는 말이죠.”
사약 조제에 쓰이는 극약도 넣어
백화주가 완성되는 데는 대략 100일이 걸린다. 찬 기운이 대기를 덮는 10월 중하순쯤에 먼저 백 가지 약초로 술을 담근다. 상대적으로 다량의 누룩이 들어간다는 점이 여느 가양주와 다르다. 까닭은 “약초의 기운이 누룩의 성질을 눌러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 김씨의 설명.
“사약을 조제할 때 쓰는 초오草烏 부자附子 같은 독약도 넣습니다. 한의사들이 알면 아마 놀라 자빠질 겁니다. 하지만 이 독성을 중화시키는 다른 약재를 함께 넣기 때문에 문제없습니다.”
중화시키는 약재가 무엇이냐고 묻자 김씨는 “비밀”이라고만 말했다. 학성강당 집안 사람들, 그 중에서도 백화주를 전수 받은 이만 아는 비법이었다.
상극·상생·중화 등의 배합을 고려해 그 양이 제각각 조절된 백 가지 약초가 찹쌀·누룩과 조화를 부려 술로 숙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20일. 처음 3∼4일 간은 뜨끈한 아랫목에서 익다가 이후로는 서늘한 윗목으로 옮겨진다.
“물은 그냥 보통 물을 씁니다. 약초의 힘이 물 기운을 모두 품어버리기 때문에 그저 깨끗한 물이기만 하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술이라기보다는 탕약이라는 편이 나을 정도로 쓰디쓰고 검은 이 ‘술’은 미리 준비해두어 충분히 익힌 다른 곡주 항아리에 부어 다시 20일 정도 숙성시킨다. 술에 술을 첨가시키는 이 같은 과정을 두 번 더 반복하면 일단 ‘백초주’가 완성된다. 80일 정도가 걸렸다. 이제 백 가지 꽃을 넣는 일만 남았다.
▲ 백가지 약초와 곡주가 혼합돼 80일 동안 숙성된 백초주. |
ⓒ 전라도닷컴
|
봄 산수유부터 가을 감국까지
꽃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다. 맨 먼저 봄을 알리는 산수유 꽃부터 따기 시작해 서리 내릴 때까지 봉우리를 밀어 올리는 한 해의 마지막 꽃 감국까지, 약 일곱 달 동안 온 김제 들녘을 쏘다녀야 가능한 일이다.
채집한 꽃은 서늘한 그늘에서 말린다. 마른 꽃은 습기가 스며들지 않게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에 한지로 싸서 보관한다. 비 오는 날은 물론이고, 비록 날씨가 좋다 하더라도 해어름녁 또한 피해서 보관해야 제 향을 잃지 않는다. 이런 정성 때문인지 김씨가 술을 빚기 위해 펼쳐 놓은 ‘백화’는 마른 꽃인데도 빛깔과 향기가 결코 줄어들지 않은 느낌이었다.
“꽃에도 독화毒花가 있습니다. 옥잠화 싸리꽃 왜철쭉 같은 꽃들이 독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문헌에 보면 이런 독화들은 못 넣게 되어 있죠. 그래도 그냥 넣습니다. 경험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요.”
술은 ‘몸’으로 만든다는 것이 김씨의 생각이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양주가 있었고, 형제지간이 5남2녀이지만 오직 김씨만이 술을 담글 줄 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뒤꽁무니를 졸졸졸 따라다니며, 그저 재미있어서 배웠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술이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더라는 것이 지금껏 김씨가 봐온 경험이다.
큰 원칙은 있어도 세부적은 공식은 없는 것이 또한 술이기도 하다. 술은 곧 약이었기 때문에 가양주는 그 집안의 기운에 따라 해마다 달리 담가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안의 누군가가 폐가 안 좋으면 그걸 고치는 데 좋게끔 약초를 비롯한 누룩이나 덧술을 조절하는 식이다.
▲ 백초주에 명주 보자기에 산 '백화'를 재우고 난 뒤 20일을 숙성시키면 백화주가 완성된다 |
ⓒ 전라도닷컴 |
백가지 꽃을 명주 포대기에 담아 ‘백초주’에 재워 두고 나서 20일이 경과하면 ‘백초화춘’, 곧 ‘백화주’가 완성된다. 찹쌀 한가마니(80kg)와 백 가지 약초, 백 가지 꽃이 융합하여 백일만에 나온 양은 약 두말 반. 김씨는 “좋게 말하면 최고의 공력을 들인 술이겠지만, 다르게 보면 호사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죠”라고 말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술은 ‘몸’으로 만드는 것
나이 예순이 넘으면 백화주를 빚을 수 없다. 어머니도, 할머니도 모두 예순을 넘기면서부터는 술에 손을 대지 않았다. 술은 정신의 힘으로 빚는 것이기 때문에 쇠한 기운으로 담가서는 술을 망치게 된다는 것이 집안의 가르침이었다고 한다.
백화주의 기원은 김씨의 13대 조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기묘사화와 함께 중앙정계를 떠난 조광조의 제자 김호의金好衣였다. 그는 유훈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학문을 끊지 말 것이며, 높은 벼슬에 오르지 말 것이며, 큰 부자가 되지 말 것이며, 문집을 만들지 말 것이며, 매년 섣달에 백화주·백초주 중 한 가지를 빚어 제사와 손님 받들기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가승보와 경주김씨세보에 남겨 놓았다.
청빈하고 단아한 선비의 기품을 지키라는 것으로 해석되는 이 유훈은 지금 김씨의 부친인 김수연(78)옹이 세운 ‘학성강당’이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누구든 찾아와 제 힘으로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를 마련하면서 무료로 한학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보통의 백화주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정성과 세심함이 깃든 학성강당의 백화주는 ‘기술’이 아니라 ‘정신’에서 비롯됐음을 깨우쳐 주는 대목이다.
송화대력주松花大力酒, 불로주不老酒와 함께 학성강당의 백화주는 ‘천하 3대 명주’로 불린다. 앞의 두 술은 신화에서나 나오는, 현실에는 없는 술이다. 그러니,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천하의 명주는 백화주가 유일한 셈이라고 할까.
<전라도닷컴>
'건강생활 > 좋은 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산야초를 이용한 약주 (0) | 2008.12.14 |
---|---|
[스크랩] 석탄주 (0) | 2008.12.14 |
[스크랩] 소주 안주 (0) | 2008.10.19 |
식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메뉴 5가지 (0) | 2008.10.08 |
[스크랩] 위장에 좋은 7가지 식품 (0) | 2008.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