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차가 써금써금 해도
달린디는 아무 지장이 없어
아이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컴퓨터나 텔레비전만 보고 있을 때, 좋아할 부모가 어디 있으랴? 그런데 그러던 아이가 어쩌다가 채근도 하지 않았는데,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을 볼라치면 괜히 흐뭇해지고, 간식이라도 챙겨 주고 싶은 것이 또한 부모 마음이다. 그럴 때에는 평소에 엄하던 말씨도 부드럽게, "쉬엄쉬엄 쉬어 가면서 해라" 하면서, 오히려 휴식을 종용하기조차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쉬어 가면서 일을 천천히 하는 모양을 형용하는 표현으로 우리말에는 '쉬엄쉬엄'이란 부사가 있다. 이 말이 동사 '쉬다'에서 왔음은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인데, 이와 같이 우리말에는 동사에 접미사 '-엄'을 붙이고 이를 다시 한 번 더 반복하여 부사를 만드는 특유한 방법이 있다. 이렇게 해서 생긴 부사는 동작이 여러 번 시행되는 말맛이 있어서 '쉬엄쉬엄'은 쉬는 동작이 적어도 두 차례 이상 있어야 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 뜻을 '쉬어 가면서'라고 풀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표준말에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부사가 몇 가지 확인되는데, 예를 들어 '띄엄띄엄'이나 '주섬주섬'과 같은 말이 이 범주에 든다. '띄엄띄엄'은 물론 동사 '뜨다'에서 온 것이고, '주섬주섬'은 동사 '줏다'에서 온 것이다. 두 말 모두 반복되는 느낌이 있어 '띄엄띄엄'은 사이가 벌어진 모양이 여럿 있는 느낌을 주고, '주섬주섬'은 줍는 동작이 여러 차례 계속되는 말맛을 풍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섬주섬'이다.
이 말이 동사 '줏다'에서 온 것이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표준어는 '줏다'가 아닌 '줍다'이다. 그래서 표준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말을 만들면 '주섬주섬'이 아닌 '주범주범'이 되어야 할텐데, 실제는 '주섬주섬'만이 쓰인다. 이것은 원래 '줍다'의 옛말이 '줏다'이었고, '줏다'가 쓰이던 당시에 이를 바탕으로 하여 '주섬주섬'이란 부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전라도 말에서는 '줍다' 이전의 '줏다'가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므로 '주섬주섬'이란 부사와의 관련성이 표준말에 비해 훨씬 큰 것이 사실이다.
전라도 말 가운데도 이런 식으로 해서 생겨난 부사가 몇몇 쓰인다. 예를 들어 물건이 오래 되어 낡게 되면 흔히 전라도 말로 '써금써금'이라고 한다. "내 차가 써금써금해도 달린 디는 아무 지장이 없어."라고 말할 때의 '써금써금'이 그것이다. 이 말은 당연히 동사 '썩다'에서 온 것이고, '쉬엄쉬엄'의 예를 볼 때, 원래는 '썩엄썩엄'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다만 '썩엄썩엄'의 모음 '어'가 '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더끔더끔'이란 전라도 말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동사 '덖다'는 물기가 약간 있는 고기나 콩 또는 약재 등을 볶아서 익히는 행위를 말한다. 녹차를 만들 때에도 찻잎을 덖어서 만든다고 하는데, 이런 덖는 동작을 여러 차례 행할 때 우리는 흔히 '더끔더끔'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이 너물이 뵈기는 이래도 더끔더끔 덖어서 묵으면 맛나라우"처럼 쓰일 수 있다.
이 '더끔더끔'도 원래는 '덖엄덖엄'에서 온 것일 터이지만 모음 /어/가 /으/로 변하여 지금처럼 '더끔더끔'으로 쓰이는 것이다. 이러한 모음의 변화는 '써금써금'에서도 일어난 것을 보면 대체로 자음 /ㄱ/이나 /ㄲ/과 같은 소리 다음에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갓난 아이가 상 위에 놓인 음식을 손으로 덥석덥석 집으면서 먹을 때 흔히 "애기가 지범지범 잘도 줏어 묵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 때 쓰인 '지범지범'이란 부사도 그 구성 방식은 위에서 든 예와 같아서, 동사 '집다'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지범지범'이란 말만을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그 어원을 알기 어렵지만, '쉬엄쉬엄'과 같은 류의 낱말들과 더불어 생각해 보면 그 구조를 이해하는 일이 결코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표준어에 없는 '써금써금, 더끔더끔, 지범지범'과 같은 낱말이 전라도 말에 흔히 쓰이는 것으로 미루어 접미사 '-엄'을 붙여 부사를 만드는 방식은 표준말보다는 전라도 말에서 더 생산적임을 짐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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