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잔혹사, 황경로 전 회장 인터뷰
▶ 정부가 세우고 국민이 키운 포스코가 흔들리고 있다. 정부 주식이 단 한 주도 없는데도 포스코를 정권의 전리품으로 여기는 최고권력과 권력에 줄을 대어 최고경영자 자리를 노리는 내부 인사들의 분열, 포스코의 창업자인 박태준 전 명예회장의 사후 '포스트 티제이(TJ)' 자리를 노리는 실력자 등. 국민기업 포스코를 과연 누가 흔들고 있는지 파헤쳤다.
정부는 주식 한주도 없으면서
포스코를 전리품 취급
박태준 명예회장 없다고
아예 재벌에 팔아버릴까 걱정
퇴직임원 모임인 중우회가
정권 개입 막는 울타리 될 것
회장도 너무 오래할 생각 말고
후계자 키우는 시스템 갖춰야
지난 5월 말 전남 포스코 광양제철소에서는 현장 간부를 상대로 한 긴급 설명회가 열렸다. 권력 실세의 회장 인사 개입과 학교법인 포스텍의 저축은행 투자 손실, 파이시티 특혜 등 의혹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생산현장까지 동요하기 시작하자 차단에 나선 것이다. 경북 포항제철소에서도 한주 전 같은 행사가 열렸다.
최근 포스코 위기는 권력이라는 외부세력의 부당한 개입 의혹에 조직 내부의 분열이 중첩되면서 복잡하고도 미묘한 양상을 띠고 있다. 포스코 안에서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 <한겨레>는 포스코 위기의 실상과 해법을 사심 없이 듣기 위해 적임자를 찾다가 황경로 전 회장을 만나기로 했다. 그는 포스코 창립 멤버로, 퇴직임원 모임인 중우회 회장이다. 박태준 회장이 1992년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와이에스(YS·김영삼 전 대통령)와의 갈등으로 퇴진하자 그 뒤를 이어 2대 회장을 지냈다. 창업자인 박 전 명예회장이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포스코의 가장 웃어른인 셈이다. 그는 김영삼 정부의 압력으로 6개월 만에 회장을 그만뒀다. 1968년 설립 이후 45년 동안 끊임없이 권력의 개입에 시달려온 포스코 역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황경로 전 포스코 회장과 전화 연결이 된 것은 지난 29일 밤늦은 시간이었다. 황 전 회장은 최근 포스코 사태에 관해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에게 "잘못 말하면 오비(퇴직임원)들이 간섭한다는 얘기만 듣는다"며 사양했다. 대일청구권 자금 일부인 7200만달러와 해외차관 5000만달러를 포함한 국민 혈세로 지어져 세계적 철강회사로 성장한 포스코가 1992~1993년 최고경영자(CEO) 연쇄교체 사태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는데 원로들이 버팀목이 돼야 하지 않느냐고 졸랐다. 황 전 회장과의 인터뷰는 이처럼 20년 만에 재연되고 있는 국민기업 포스코의 최대 위기를 걱정하는 공감 속에서 어렵게 이뤄졌다. 다음날인 30일 오후 서울 역삼동 한 식당에서 만난 황 전 회장은 1930년생(82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역대 정권은 각종 이권을 챙기려 했다
-국민기업인 포스코가 최근 크게 흔들리고 있다. 철강업계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회사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원자재값 급등과 중국의 덤핑공세, 현대제철이라는 경쟁자의 등장 등 어려운 경영여건 속에서도 매출 증가세가 지속되고 이익도 꾸준히 내고 있다. 경영은 기본적으로 잘하고 있다. 하지만 자꾸 언론에 회사와 관련해 안 좋은 기사가 나니까 임직원이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것 같다."
조강(가공되지 않은 강철) 생산능력 3700만t으로 세계 6위의 철강업체인 포스코는 한국경제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4월 현재 포스코는 계열사 70개에, 자산 80조6천억원으로 재계 6위에 올라 있다. 다른 재계 상위그룹은 모두 총수가 있는 재벌이지만, 포스코는 케이티(KT)와 함께 지배주주가 없는 말 그대로 '국민기업'이다.
특히 정부는 단 한주의 주식도 갖고 있지 않다. 경제 전문가들은 포스코에 권력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시장경제원리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포스코 사태도 결국 권력 실세들이 2009년 회장 인사에 부당하게 개입한 의혹이 발단이 됐다. 정준양 회장과 함께 시이오 후보였던 윤석만 사장은 2009년 1월29일 시이오후보추천위원회에서 "(권력 실세로부터) 후보 사퇴 압력을 받았다"고 직접 폭로했다.
-권력이 포스코를 여전히 정권의 전리품 정도로 생각하는 것 아닌가?
"포스코는 45년간 주인 없는 회사로 경영이 잘 돼왔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정부가 개입만 안 한다면 이상적인 경영시스템이다. 지금 흔들린다고 해서 과거 국영기업 시절로 되돌아가거나, 재벌 오너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 지분은 하나도 없고, 외국인 지분이 50%에 육박하는 기업에 권력이 개입하면 안 된다. 재벌들도 포스코가 주인 없는 회사여서 흔들린다고 부추기면 안 된다. 국민기업인 포스코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포스코 계열사의 한 고위 임원은 "역대 정권은 주인 없는 포스코를 당연히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각종 이권을 챙기려 했다"며 "이것이 포스코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게 된 근본 이유"라고 지적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은 포스코 인사 개입의 배후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포스코의 전 고위 임원은 "이 전 의원이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포스코 간부들과의 한 모임에서 '이구택 회장이 야당 시절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고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들었다"며 "포스코는 이명박 정부 4년간 권력 실세들의 먹잇감이 됐다"고 털어놨다. 이구택 회장이 임기 중에 물러난 것은 정권 실세들이 포스코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이 회장을 정리한 셈이다.
권력 실세들의 최종 목표는 포스코의 이권을 챙기는 것이다. 포스코 주변에서는 그것이 주로 포스코건설을 통해 이뤄진다고 말한다. 포스코의 한 전직 고위 임원은 "포스코는 나름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사회에서 감시의 눈이 많기 때문에 포스코건설을 활용한다"며 "건설업종 특성상 많은 협력사와 거래해, 이권을 챙기기도 쉽다"고 말했다. 이권을 챙기는 또다른 통로는 100여개에 이르는 포스코의 외주파트너사(협력업체)이다. 이들은 주로 포항과 광양제철소에서 포장, 정비보수 등 보조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포스코의 한 전직 임원은 "외주파트너사는 포스코 간부 출신이 회사를 그만둔 뒤 몇년간 사장을 맡았다가 후배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게 일반적인데, 권력 실세의 줄을 잡은 사람들이 알짜배기 회사를 개인소유로 인수해 특혜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회장 교체시기는 정권 교체기와 정확히 일치
권력이 이권을 챙길 때는 옆에서 이를 도와주고 떡고물을 챙기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포스코의 한 전직 임원은 "이명박 정부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포스코건설의 정동화 부회장과, 파이시티 사건에서 박영준 전 차관의 돈세탁 창구 혐의를 받고 있는 이동조 제이앤테크 회장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포스코 안에서는 현실론도 제기된다. 한 임원은 "누가 포스코 회장이 돼도 정치권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며 "때로는 회사에 더 큰 손실이 초래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작은 이권은 양보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번 사태는 1992~1993년 불과 1년반 사이에 포스코의 최고경영자 4명(박태준-황경로-정명식-김만제)이 잇달아 바뀌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이후 20년 만의 최대 위기다. 당시에도 권력의 개입이 원인이었는데?
"박태준 회장의 퇴진은 1992년 대선에서 와이에스(YS)를 지원하지 않은 데 대한 정치보복이었다. 와이에스 정권이 들어선 뒤인 1993년에는 '박태준 사단'이라는 이유로 나를 포함해 7~8명이 한꺼번에 쫓겨났다."
포스코의 최고경영자는 초대 박태준 회장을 시작으로 황경로, 정명식, 김만제, 유상부, 이구택을 거쳐 현재의 정준양 회장까지 7번째다. 전임 회장 6명은 모두 임기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거나 타의에 의해 물러났을 정도로 포스코의 '시이오 잔혹사'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회장 교체 시기의 대부분이 정권 교체기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포스코가 태생적으로 정치적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1992년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자당의 김영삼 대통령 후보는 박태준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와이에스는 5분만 말해보면 바닥이 드러나는데,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박 회장은 1992년 10월5일 포스코에서 퇴진했고, 대신 황경로 회장-정명식 부회장-박득표 사장 체제가 들어섰다. 정권은 한번 눈 밖에 난 포스코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황 회장 체제는 6개월 만에 막을 내리고, 1993년 3월 주총에서 정명식 회장-조말수 사장 체제가 출범했다.
정권의 보복은 이어졌다. 포스코와 박태준 사단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국세청 세무조사와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박 회장은 일본으로 사실상 망명을 떠났다. 국세청과 검찰은 360억원에 이르는 박 회장의 숨겨진 재산을 찾아냈다고 발표했고, 황 회장과 유상부 부회장은 6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정명식 회장-조말수 사장 체제도 내부 갈등 끝에 1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것은 김만제 전 재무장관이 외부에서는 처음으로 포스코 회장으로 들어오는 빌미를 줬다. 1998년 디제이피(DJP) 연합을 통해 집권한 김대중 정부에서 박태준 명예회장이 총리를 맡으면서 외부환경은 180도 바뀌었다. 결국 김만제 회장은 임기를 못 끝낸 채 물러나고 유상부 회장이 1998년 3월에 취임했다. 유 회장은 2003년 연임을 추진했는데 주총 하루 전날 돌연 사임했다. 유 회장의 사임으로 가장 선임이었던 이구택 사장이 회장으로 선임됐다. 유 회장의 사임 이유에 대해서는 박 명예회장과 인사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었다는 설과, 정권 교체기에 외부 인사를 시이오로 선임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설, 노무현 정부의 퇴진압력설이 엇갈린다.
외풍 빌미 준 회장들의 개인비리 의혹은?
이구택 회장은 외부 입김 차단과 독립경영을 위해 전원 사외이사로 된 시이오후보추천위원회를 신설하는 등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단행했다. 하지만 이 회장도 임기가 남은 상황에서 2009년 1월 전격 사임했다. 이 회장은 사퇴 직전까지 포스코의 국세청 세무조사 로비 의혹과 관련해 검찰 압수수색설에 시달렸다.
-1993년 회장에서 물러날 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나?
"1992년 10월 회장이 될 때 (노태우)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 1993년 3월 주총에서도 결산보고까지 마쳤다. 하지만 권력 실세가 직접 개입하니 소용이 없었다."
그 권력실세가 누구였는가?
"(잠시 멈칫하더니) YS의 측근이었던 김무성 전 의원이다.(김 전 의원은 김영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행정실장을 거쳐 대통령 민정비서관과 사정비서관을 지냈다)"
2009년 초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불리는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과 이상득 전 의원의 보좌관 출신인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이 포스코 회장 인사에 입김을 작용했다. 두 사람은 회장이 선임되기 석달 전인 2008년 11월부터 당시 차기 회장 후보로 거론되던 윤석만 사장과 정준양 사장은 물론 박태준 명예회장, 이구택 회장 등과 잇달아 만나 사전심사를 했다.
현 포스코 위기에는 권력의 개입 의혹과 함께 내부 분열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내부가 하나로 단결된 것은 아니다. 자기 생각을 과장해서 언론사에 퍼뜨려 회사를 흔드는 일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포스코 안에서는 황 회장과 다른 시각도 있다. 현 경영진을 비판하는 쪽에서는 "원로 중에서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한다.
회사를 흔드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추측은 한다. 한두 사람이 그런다."
결국 선후배 사이일 텐데, 직접 만날 생각은 없는가?
"조만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충고를 할까 생각하고 있다."
비판세력들은 현 경영진에 대해 회장 선임과정에서의 문제와 개인비리 의혹을 동시에 제기한다. 한 관계자는 "포스코가 외풍에 흔들리는 것은 현 경영진이 그런 빌미를 줬기 때문"이라며 "경영진이 깨끗하다면 문제가 될 게 없었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 비판자들은 현 사태가 이미 선을 넘었다고 말한다. 한 관계자는 "(현 경영진으로는 외풍을) 막을 수 없고, 막을 필요도 못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박태준 회장이 생전에 정준양 회장에 대해 물욕이 많아서 안 된다고도 했다"고 말했다. 황 회장에게 다시 물어봤다.
박 명예회장이 생전에 정 회장을 가리켜 물욕이 많다고 한 적이 있나?
"능력은 있는데 말이 다소 많다는 얘기를 한 적은 있다. 하지만 물욕 얘기는 처음 듣는다."
경영진 쪽에서는 회사를 흔드는 불순세력이라고 하지만 비판하는 쪽에서는 현 경영진이 태생부터 정통성이 없는데다 정권과 손잡은 부패세력이라고 비판한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현 경영진에) 비리가 있다면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겠지. 설령 있다고 해도 다른 회사보다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말 정 회장이 연임의사를 비쳤을 때 선뜻 동의한 것도 그 때문이다. 처음 선임될 때 의문이 제기됐지만, 벌써 지난 일이고 그동안 경영성과를 냈기 때문에 특별히 바꿀 이유는 없다고 봤다."
2009년 1월 시이오후보추천위원회가 열리기 직전에 정준양 회장 비리가 담긴 투서가 언론사에 전달됐고, 일부 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포스코는 이에 대해 "회사 차원에서 조사를 벌여 혐의가 없다는 점을 시이오후보추천위원회에 보고했고, 민주당에서 이후 같은 내용으로 검찰에 고발했지만 역시 무혐의로 나왔다"며 억울해한다. 계열사의 한 고위 임원은 "권력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전임자를 퇴임시키는 데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새 회장 선임은 포스코의 시이오 선출절차로 볼 때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만약 정권이 시이오후보추천위원회에 압력을 넣었다면 박원순, 안철수 같은 사외이사들이 가만히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포스코에서는 비리투서가 정 회장의 경쟁자 쪽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의심한다.
박태준은 YS에 찍혀 퇴장
황경로 6개월, 정명식 1년…
1년반동안 회장 무려 4번 교체
임기 채우고 떠난 회장 없어
엠비정부가 밀어준 정준양
한쪽선 "정권과 손잡은 부패세력"
경영진은 "회사 흔드는 불순세력"
외풍에서 내부 분열로 번져
'재벌에 매각' 꾸미지 않을지 경계해야
포스코의 창업자로 지난 45년 동안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외부 입김을 막는 울타리 구실을 해온 박태준 회장이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났다. 일부에서 '포스트 티제이(TJ·박태준의 별칭)'를 노린다는 얘기도 들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태준 회장은 포스코를 창업하고, 숱한 어려움을 극복해, 오늘날의 포스코 성공 신화를 만든 주역이다. 개인 역량이나 회사에 대한 공헌도에서 박 회장에 비견될 만한 사람이 어디 있나. 나도 절대 '포스트 TJ'가 아니다. 제2의 박태준은 없다."
경영진 쪽에서는 일부 인사가 포스코를 사유화하기 위해 '포스트 TJ'자리를 노린다고 경계한다. '포스트 TJ'를 노리는 인사로는 박태준 회장의 왼팔로 불렸던 이대공 포스코 교육재단 이사장이 꼽힌다. 이 이사장은 1998년부터 15년째 이 자리를 맡아왔다. 포스코 안팎에서는 이미 지난해 가을 교육재단 이사진의 물갈이가 쟁점이 됐을 때부터 양쪽의 갈등이 표면화됐다고 말한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현역에서 물러난 뒤에도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포스코를 보호하는 울타리 구실을 했지만, 동시에 '상왕' 노릇을 했다는 비판도 있다. 포스코의 전직 고위 임원은 "박 명예회장은 1992년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차기회장 선임 등 인사에도 간여했다"며 "이 때문에 자기가 앉힌 회장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대공 포스코 교육재단 이사장은 지난해 말 "박 명예회장은 포스코가 특정 세력이나 기업에 경영권을 뺏길까봐 가장 우려했다"며 "포스코는 박태준이 있었기에 그나마 정치 외풍에 적게 흔들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시 정권 교체기가 다가오는데, 포스코가 권력의 개입을 받지 않기 위한 묘책은 없을까?
"회장이 후계자를 키우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회장이 너무 오래 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포스코의 위기가 더 깊어지면 포스코 현직 원로들과 퇴직임원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을 텐데.
"중우회가 포스코의 강한 울타리 역할을 할 생각이다. 그를 위해 당연직인 전임 회장과 사장을 포함해 25명 내외의 운영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시스템을 바꾸려고 한다. 이미 내부 합의는 끝났고, 가을 정기총회에서 구체화할 것이다. 앞으로 외부 입김에 강력 대처할 것이다."
내년 정권 교체기에 대비하는 성격인가?
"그렇다. 과거 정권에서 포스코를 재벌에 매각하는 방안이 거론된 적이 있는데 박태준 회장이 살아 있어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재벌이 정부와 짜고 그런 일을 꾸미지는 않는지 항상 경계해야 한다. 박 회장이 죽은 뒤 내가 가장 신경을 쓰는 사안이다."
황 회장은 "정치도 발전했으니 앞으로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아, 지금의 (포스코에 대한) 걱정이 기우가 되기를 희망한다"며 "창립멤버로서 죽는 날만 기다리는 처지에서 유일한 바람이니 언론에서도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늙은 회장의 눈에서 국민기업 포스코가 박태준 회장 사후에도 정치권의 입김으로부터 독립해 홀로서기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읽혔다.
곽정수 선임기자jskwak@hani.co.kr
"악순환 막으려면 대통령 의지가 중요"
지배구조 개선안 만든 장하성씨
"12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은 집권할 경우 포스코 인사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장하성(사진) 전 고려대 경영대학장은 지난 29일 <한겨레>와 한 국제전화 인터뷰에서 포스코 회장 인사에 권력의 입김이 작용하는 악순환을 막으려면 "대통령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장 전 학장은 2006년 포스코가 투명하고 독립적인 최고경영자 선임을 위해 시이오(CEO)후보추천위원회를 신설할 때 기업지배구조 개선방안을 직접 디자인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을 주도했던 장 전 학장은 현재 중국 상하이에 머물며 '한국형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
포스코는 그동안 선진형 기업지배구조를 가진 기업으로 평가받아 왔다. 어떻게 포스코 기업지배구조 개선안을 만들게 됐나?
"처음에는 3번이나 사양했다. 4번째는 이구택 회장이 직접 전화해서 부탁을 하더라."
사고초려(四顧草廬)였던 셈인데, 결국 수락한 이유는?
"원래 기업 관련 프로젝트는 안 하는데, 이구택 회장과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프로젝트를 맡는 대신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는 나에게만 맡기면 편향될 수 있으니 다른 팀에게도 똑같은 프로젝트를 맡겨서 복수경쟁을 시켜달라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최종 결과가 나오면 그냥 서랍 속에 넣어 썩히지 말고 공청회를 거쳐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이구택 회장이 승낙하던가?
"그러니까 맡았지. 나중에 2개의 보고서를 가지고 내부임원들과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토론회를 했다."
그렇게 객관적이고 엄정하게 만든 지배구조인데, 2009년 회장 선임과정에 권력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제도에 허점이 있는 것은 아닌가?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안 지키면 아무 소용 없다.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선의를 가지고 해야 한다."
포스코는 정부 지분이 하나도 없는 민간기업이다. 포스코의 회장 선임과정에 권력의 입김설이 나오는 게 말이 되나?
"정부가 시장경제의 기본틀을 안 지키고 있다. 정부가 부당하게 인사개입을 하는 곳은 포스코만이 아니다. 공기업에서 민영화된 케이티나 금융지주회사의 최고경영자 임명에도 개입하고 있지 않나."
권력의 인사개입으로 포스코가 어떤 악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나?
"정준양 회장은 올해 초 연임에 성공했지만, 회사 안에서 영이 제대로 서겠나? 투자자들에게도 회사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기업은 최고경영자가 가장 중요하다. 세계적 기업인 포스코의 최고경영자가 회사 내부와 시장에서 모두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치명적이다."
포스코 사태가 재연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있을까?
"이번 대선에 출마하는 후보들이 집권하면 포스코 회장 인사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지난해 초 포스코 시이오추천위원회에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박원순 서울시장 등 명망 있는 분들이 사외이사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 정도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권력의 입김이 작용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대통령이 어떤 의지와 철학을 갖느냐가 중요하다."
글 곽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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